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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치 요시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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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우치 요시오키는 1477년 오우치 가문의 14대 당주 오우치 마사히로의 아들로 태어났다. 1494년 가문을 계승한 후, 규슈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1500년 망명한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네를 지원하여 교토에 막부를 세우는 데 기여했다. 이후 아마고 가문과의 전투, 무역 활동을 벌였으며, 1528년 사망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따서 가신들에게 '흥(興)' 자를 하사하여 세력을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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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치 요시오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야마구치 현립 야마구치 박물관 소장 오우치 요시오키 상
오우치 요시오키 상(야마구치 현립 야마구치 박물관 소장)
시대무로마치 시대 후기(센고쿠 시대 전기)
출생분메이 9년 2월 15일(1477년 3월 29일)
사망교로쿠 원년 12월 20일(1529년 1월 29일)
아명기도마루(亀童丸)
통칭로쿠로(六郎) 또는 지로(次郎)
존칭오우치노스케(大内介)
계명능운사전걸수요수(凌雲寺殿傑叟義秀)
묘소능운사(야마구치현야마구치시)
관위종3위・사쿄노다이후(左京大夫), 스오노곤노스케(周防権介)
씨족다타라 성오우치 씨
가계
아버지오우치 마사히로
어머니이마노코지(今小路, 가모 신사 사가鳥居大路氏의 딸이자 하타케야마 요시미치의 양녀)
형제오우치 요시오키, 다카히로(隆弘), 딸(무나가타 대궁사의 부인)
정실나이토 히로노리의 장녀 (동향전(東向殿))
자녀오미야히메(요시미 다카요리, 후일 요시미 마사요리의 부인), 오우치 요시타카, 딸(오토모 요시아키의 정실), 딸(호소카와 모치타카의 정실), 딸(이치조 후사후유의 부인), 오우치 히로오키, 딸(아시카가 요시쓰나의 정실)
관직 및 직위
막부무로마치 막부스오 국・나가토 국・이와미 국・지쿠젠 국・아키 국・부젠 국・야마시로 국 슈고, 관령대

2. 생애

오우치 요시오키는 1477년(분메이 9년)에 오우치 가문 14대 당주였던 오우치 마사히로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가메도마루(亀童丸)였다.[2][3] 1488년(조쿄 2년) 1월 30일 교토에서 성인식을 치르고 쇼군 아시카가 요시히사에게 '요시(義)'라는 글자를 받아 '요시오키(義興)'라는 이름을 받았다.[4]

1492년(메이오 원년) 아버지의 명으로 로쿠가쿠 다카요리 토벌에 참전했다. 그러나 1493년(메이오 2년) 간레이 호소카와 마사모토가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네를 유폐하는 메이오 정변이 발생하자, 요시오키는 군사를 셋쓰 국 효고에 물린 채 사태를 관망했다. 이 정변과 관련하여 호소카와 마사모토 파의 다케다 모토노부 부하에게 당시 교토에 체류 중이던 요시오키의 여동생이 납치당하는 사건이나, 아버지 마사히로가 요시오키의 측근에게 할복을 명하는 사건 등이 발생했다. 이는 호소카와 마사모토 등이 아시카가 요시타네를 지지하는 오우치 마사히로를 두려워하여 어린 요시오키에게 압력을 가했고, 그 대응이 미숙하여 본국에 있던 마사히로의 분노를 산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이 출병은 교토 출신인 요시오키와 본국 피관과의 관계 구축에 크게 기여하여 가독 계승 후 요시오키의 지배에 도움이 되었다.

1494년(메이오 3년) 가을, 아버지가 병으로 은퇴하자 가독을 물려받아 오우치 가문 제15대 당주가 되었다. 그러나 요시오키에게 가독이 계승되기 전후로 오우치 가문 내에서 불안한 사건이 잇따라 발생했다.

오우치 가문은 오랫동안 기타큐슈에서 오토모 가문, 쇼니 가문 등과 전투를 벌이며 세력을 확장해 왔다. 그러나 오토모 마사치카가 오우치 마사히로의 여동생과 결혼하고, 그녀가 낳은 오토모 요시우가 가독을 계승하면서 요시오키와 요시우는 사촌으로서 협력하는 안정된 관계를 구축했다. 그런데 1496년(메이오 5년) 요시우가 급사하자, 요시우와 대립했던 아버지 마사치카가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실권을 되찾은 마사치카는 기타큐슈의 오우치 영지 침공을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마사치카가 탄 배는 난파되어 오우치 가문의 본거지인 나가토 국에 도착하고 만다. 요시오키는 격노하여 마사치카를 잡아 할복시켰다. 이 사건의 배경에는 오우치 가문의 세력 확장과 호쿠리쿠 지방에 망명 중이던 전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네와의 연계를 우려한 호소카와 마사모토의 암약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요시오키는 오토모 지카자네를 오토모 가문의 후계자로 삼으려 했으나, 마사치카의 동생 오토모 지카하루의 반항으로 실패했다.

한편, 지쿠젠 국 탈환을 노리고 있던 쇼니 마사스케·쇼니 다카쓰네 부자도 오토모 마사치카·지카하루 형제와 결탁하여 히젠 국에서 지쿠젠 국으로 군사를 진격시켜 오우치 군과 싸웠지만, 요시오키도 1496년(메이오 5년) 말에는 아카마가세키에 군사를 집결시켜 12월 13일에 지쿠젠으로 출진하였다. 1497년(메이오 6년) 3월 13일에 하카타 세이후쿠지 문 앞에서, 3월 15일에는 지쿠시무라와 다카토리이 성에서 싸워 지쿠젠에 쳐들어온 쇼니 부자를 무찔러 히젠으로 침공하였다. 3월 23일, 히젠 아사히 성을 함락시켰다. 4월 14일, 쇼니 마사스케를 오기 성에 포위했다. 일단 야마구치로 귀국한 요시오키는 4월 16일, 스오 국 이치노미야의 다마소 신사, 니노미야의 이즈모 신사, 산노미야의 니카베 신사, 시노미야의 아카타 신사, 고노미야의 아사다 신사에 참배하였다. 4월 18일, 오기 성은 함락되었고 쇼니 마사스케는 도망쳤지만 후에 자결하였다.

이후에도 요시오키는 쇼니 가문에게 공격받고 있던 규슈 단다이 시부카와 이네시게를 지원했다. 1498년(메이오 7년) 8월 27일, 히젠 국 아야베 성에 공격받고 있던 이네시게에게 원군으로 파견된 닌호고쿄가 히젠 기이 군 요부 군에서 싸워 승리하였다. 또한 9월 17일에도 호고쿄는 히젠 미네 군에서 싸워 여기서도 승리하였다. 이와 같이 요시오키의 군세는 승리를 거듭하여 히젠 국에서의 자신의 세력도 확장하였다. 한편 오토모 가문과의 싸움에서는 방어에 힘썼다.

그러던 중 1500년(메이오 8년) 12월 30일 여러 지역을 망명하던 전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네가 요시오키를 의지하여 야마구치에 들어왔다. 요시타네는 자신을 현재에도 현직 쇼군이라고 주장하며 야마구치에 자신의 막부를 설치하였고, 요시오키도 호소카와 마사모토에 대항하여 요시타네를 옹립하여 상락하려고 했다.

요시오키는 1504년(에이쇼 원년) 무렵부터 상락의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영내에서 임시 단전 징수 등을 실시했으나, 1507년(에이쇼 4년) 6월, 아시카가 요시즈미를 11대 쇼군으로 옹립하여 막정을 좌우하던 호소카와 마사모토가 암살되었다(에이쇼의 착란). 이후에도 호소카와 가문 내부에서는 항쟁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기나이 진출의 호기로 본 요시오키는 전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네의 상락을 구실로 규슈·주고쿠 지방의 여러 다이묘들에게 동원령을 발하였다. 11월 25일에는 우다 히로아키 등에게 본국의 유수를 맡기고 야마구치에서 출발하여 보후에 나가, 12월에는 비고 국에까지 진출하였다. 이에 대해 호소카와 가문에서는 마사모토의 양자였던 호소카와 다카쿠니가 요시오키와 통하여, 마찬가지로 마사모토의 양자인 호소카와 스미모토와 대립·항쟁하여, 1508년(에이쇼 5년) 3월에 호소카와 스미모토는 다카쿠니·요시오키 등에게 압박받아 아시카가 요시즈미와 함께 오미 국으로 도주하였다.

4월 27일에 요시타네를 받들고 이즈미 국 사카이에 들어간 요시오키는 기나이의 스미모토 파를 평정하고 있던 호소카와 다카쿠니와의 연계를 강화하고, 5월 5일에는 다카쿠니를 호소카와 교초 가 당주로 인정하는 요시타네의 고나이쇼가 발표되었다. 그리고 6월 8일에 요시타네와 요시오키는 상락을 완수하였다. 상락을 완수한 요시오키는 7월 1일에는 아시카가 요시타네를 쇼군직에 복귀시키고, 자신도 사쿄노다이부·간레이다이로서 호소카와 다카쿠니와 함께 막정을 집행하는 입장이 되었다.

요시타네의 쇼군 복귀라는 역할을 완수한 요시오키는 불안정한 영국의 정세를 우려하여 귀국을 바라게 되지만, 현실적으로는 호소카와 스미모토·미요시 유키나가 등이 교토 탈환을 목표로 여러 번 반격해오기 때문에 귀국도 여의치 않았다. 1511년(에이쇼 8년) 8월 23일 후나오카야마 전투에서 호소카와 스미모토 군을 격파하고 교토를 탈환하였다. 이때 요시오키의 활약은 상당했던 것 같으며, 1512년(에이쇼 9년) 3월 26일에는 그 무공으로 종삼위에 서임되어 공경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점차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네(1513년 요시타다에서 개명)와 호소카와 다카쿠니와 불화가 되고, 더욱 길어지는 재경에 견딜 수 없게 된 영국의 이시미 국이나 아키 국의 고쿠진들 중에서 함부로 귀국하는 자가 잇따랐다. 거기에 이즈모 국의 아마고 쓰네히사가 침공을 시작하였다. 요시오키는 처음에는 재경하여 아마고 가문을 치기 위해, 1517년(에이쇼 14년)에 이시미 슈고가 되었다. 그러나 아마고 가문의 세력 확대는 억제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1518년(에이쇼 15년) 8월 2일에 간레이다이를 사임하고 사카이를 출발하여 10월 5일에 야마구치로 귀국하였다.

귀국한 오우치 요시오키가 가장 힘을 쏟은 것은 재경 중에 이반의 자세를 보인 아키 국의 다케다 모토시게, 다케다 미쓰카즈 부자와 도모다 오키후지와의 싸움이었다. 그러나 1523년(다이에이 3년)에 아마고 쓰네히사가 아키 진출을 꾀하고, 다케다, 도모다와도 통했기 때문에, 아마고 가문의 오우치 영토 침략이 본격화되었다. 이시미의 하시우라는 아마고 군에 함락되었고, 아키에서는 오우치 가문에 속해 있던 모리 가문이 아마고 쪽에 투항했다. 아마고 쓰네히사는 모리 가문 당주 모리 유키마쓰마루의 후견인인 모리 모토나리를 이용하여, 오우치 가문의 아키 경영 거점인 아키사이죠의 가가미야마 성을 함락시키는 등, 한때 오우치 가문을 압도했다. 이에 대해 요시오키는 아키, 이시미에 출병하여 매년 아마고 가문과 싸웠지만, 원하는 만큼의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하지만 1524년(다이에이 4년)에 아키 이쓰쿠시마섬에 있던 도모다 가문의 거점인 사쿠라오 성을 함락시켰고, 다케다 가문의 거점인 사토 은산 성 공방전에서 아마고 군을 격파하고, 1525년(다이에이 5년)에는 모리 가문을 계승한 모리 모토나리가 다시 귀순했기 때문에, 아키에서의 세력을 다소 회복했다.

오우치 가문 유적 료운지 터에 있는 오우치 요시오키의 묘


1528년(교로쿠 원년) 7월, 아키 몬잔 성 공격 진중에서 병에 걸려, 야마구치로 귀환 직후인 12월 20일에 사망했다. 향년 52세였다. 뒤를 이어 적남인 오우치 요시타카가 계승했다.

2. 1. 가독 상속과 내부 항쟁 (1477년 ~ 1499년)

1477년 (분메이 9년), 오우치 마사히로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명은 기도마루(亀童丸)였다.[32][33] 1488년(조쿄 2년) 1월 30일 교토에서 원복을 행하고 무로마치 쇼군 아시카가 요시히사에게 이름 한 글자(義)를 받아 요시오키(義興)라는 이름을 얻었다.

1492년(메이오 원년), 아버지의 명으로 롯카쿠 다카요리 토벌전(조쿄 엔토쿠의 난)에 참전했다. 그러나 1493년(메이오 2년) 호소카와 마사모토가 아시카가 요시키를 유폐하는 메이오 정변이 발생하자, 요시오키는 셋쓰 국 효고에 병사를 이끌고 올라온 채 사태를 지켜보았다.

이 정변과 관련하여, 당시 교토에 있던 요시오키의 누이동생이 다케다 모토노부의 부하에게 유괴되거나, 아버지 마사히로가 요시오키의 측근에게 할복을 명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호소카와 마사모토 등이 오우치 마사히로가 아시카가 요시키를 지원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인질을 잡고 어린 요시오키에게 압력을 가했고, 그에 대한 대응이 스오 본국에 있던 마사히로의 분노를 산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때의 병력 동원은 교토에서 태어났을 요시오키와 스오 본국 피관들과의 관계 구축에 크게 기여하여, 훗날 요시오키가 가독을 잇고 그의 지배에 보탬이 되었다.

1494년(메이오 3년) 가을, 아버지 오우치 마사히로가 병으로 당주 자리를 물러나 은거하면서 요시오키가 가독을 이어받아 제15대 당주가 되었다. 1495년(메이오 4년) 9월 18일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요시오키는 명실상부한 오우치 당주가 되었다.

그러나 요시오키의 가독 계승 전후로 오우치 가문 내부에 불온한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였다. 스에 오키후사의 형인 스에 다케모리가 갑자기 출분했다가 스오로 돌아와 동생 스에 오키아키를 1495년(메이오 4년) 2월에 살해했다. 다케모리는 나이토 히로노리가 요시오키를 몰아내고 동생 손코를 옹립하려 한다고 참언했고, 요시오키는 1495년(메이오 4년) 2월 28일 병사를 보내 나이토 히로노리와 그 아들 히로카즈를 주살했다.[32]

훗날 요시오키는 나이토 부자의 원통함을 알고 참언한 다케모리를 주살하고 히로노리의 딸을 자신의 정실로 맞이하고, 히로노리의 동생 히로하루에게 나이토 씨를 잇게 하였다. 스에 씨에 대해서도 막내동생인 스에 오키후사에게 뒤를 잇게 하여 재흥시켰다.

하지만 다케모리가 참소한 내용 가운데 요시오키의 동생 다이코인 손코가 새로운 오우치 당주로 옹립되기를 꾸미는 음모가 있다는 것은 1499년(메이오 8년)에 현실이 되었다. 중신 스기 다케아키라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요시오키는 이를 진압하고 다케아키라를 자살하게 하였다. 손코는 오토모 씨를 의지하여 분고 국으로 망명했다.

나이토 히로노리, 스에 다케모리, 스기 다케아키라의 주살에 대해서는, 오우치 내부에 복잡한 정치적 대립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아버지 마사히로가 아직 살아 있었을 때 스에 히로모리(다케노리, 오키아키, 오키후사 형제의 아버지)나 나이토 히로노리가 사망하였고, 유력 중신인 스에 씨, 나이토 씨가 한꺼번에 몰락하게 된 것은 마사히로의 뒤를 이은 요시오키의 지위를 안정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2. 2. 규슈 진출과 전임 쇼군의 망명 (1496년 ~ 1507년)

오우치 씨는 오랜 기간에 걸쳐 규슈 북부에서 오토모 씨(大友氏)나 쇼니 씨(少弐氏)와 항쟁하며 세력을 넓혔다. 오토모 마사치카(大友政親)가 오우치 마사히로의 누이동생을 아내로 삼아 두 집안 사이에 혼인 관계가 맺어졌고, 이어 그녀가 낳은 오토모 요시우(大友義右)가 가독을 잇게 되면서 요시오키와 요시우가 종형제로서 협력하여 안정된 관계를 쌓았다.

그러나 메이오 5년(1496년)에 요시우가 급사하고, 당시 요시우와 대립하던 아버지 마사치카가 아들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실권을 되찾으려는 마사치카는 기타큐슈의 오우치 영지를 침공하고자 병사를 일으켰다. 그런데 마사치카가 탄 배가 조난당해 오우치 씨의 본거지인 나가토에 다다랐고, 요시오키는 격분하여 마사치카를 붙잡아 할복시켰다.[36]

이 사건의 배경에는 오우치 씨의 세력 확대와 호쿠리쿠 지방(北陸地方)에 망명 중이던 전임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네(足利義稙)와의 제휴를 두려워한 호소카와 마사모토(細川政元)의 암약이 있었다. 그 뒤 요시오키는 오토모 지카쓰나(大友親綱)의 아들이자 다이쇼인(大聖院)에 있던 슈신(宗心, 오토모 지카자네)을 오토모 씨의 후계자로 내세우려 했지만, 마사치카의 동생 오토모 지카하루(大友親治)가 저항하여 실패했다. 메이오 5년(1499년)에 반란에 실패한 요시오키의 동생 다이호인 손코는 망명지에서 오토모 지카하루에게 의탁했고, 호소카와 마사모토가 옹위하던 쇼군 아시카가 요시즈미(足利義澄)의 이름자 한 글자를 받아 오우치 다카히로(大内高弘)로 개명했다.

한편, 지쿠젠 탈환을 노리던 쇼니 마사스케(少弐政資) ・ 쇼니 다카쓰네(少弐高経) 부자는 오토모 마사치카 ・ 지카하루 형제와 결탁하여 히젠 국(肥前国)에서 지쿠젠 국으로 병사를 진군시켜 오우치와 싸웠다. 요시오키도 메이오 5년(1496년) 말 아카마세키(赤間関)에 병사를 결집시켜 12월 13일 지쿠젠을 향해 출진했다.[36][37] 메이오 6년(1497년) 3월 13일 하카타(博多) 세이후쿠지(聖福寺) 문앞, 15일 지쿠시무라(筑紫村)와 다카토리이 성(高鳥居城)에서 전투를 벌여 지쿠젠으로 쳐들어온 쇼니 부자를 격파하고 히젠으로 침공했다. 3월 23일 히젠 아사히 성(朝日城)을 공략하고, 4월 14일 쇼니 마사스케를 고쇼 성(小城城)에서 포위했다. 야마구치로 돌아온 요시오키는 16일 스오 경내 이치노미야(一宮) 玉祖神社, 니노미야(二宮) 出雲神社, 산노미야(三宮) 仁壁神社, 시노미야(四宮) 赤田神社, 고노미야(五宮) 浅田神社를 참배했다.[36] 4월 18일 고쇼 성(小城城)이 함락되고 쇼니 마사스케는 자결했다.

쇼니 마사스케의 셋째 아들 쇼니 스케모토(少弐資元)는 분키 원년 (1501년) 거병, 에이쇼 3년 (1506년) 오토모 지카하루와 연대하여 오우치 령 공격을 계획한다. 메이오 8년 (1500년) 메이오 정변으로 교토에서 쫓겨난 전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네(足利義稙)가 야마구치에서 생활하고 있었기에, 요시오키는 에이쇼 4년 (1507년) 요시타네의 중개로 쇼니 스케모토와 화친, 규슈 북부를 세력하에 두었다.

2. 3. 기나이 출병과 막정 장악 (1507년 ~ 1518년)

1507년 6월, 아시카가 요시즈미를 제11대 쇼군으로 옹립하여 권력을 장악한 간레이 호소카와 마사모토가 암살되었다. 그 후, 호소카와 가문 내에서 분쟁이 계속되자, 오우치 요시오키는 기나이 진출을 계획한다. 요시오키는 규슈, 주고쿠 지방의 여러 다이묘에게 동원령을 내렸고, 11월에 야마구치를 출발하여 12월에는 빈고에 도착했다. 이에 호소카와 가문에서는 호소카와 마사모토의 양자였던 호소카와 다카쿠니가 오우치 요시오키와 손을 잡고 호소카와 스미모토와 대립하였다. 1508년 3월, 호소카와 스미모토는 다카쿠니와 요시오키에게 밀려 아시카가 요시즈미와 함께 오미로 피신하였다. 6월, 교토에 입성한 요시오키는 7월에 아시카가 요시타네를 쇼군직에 복귀시켰고, 자신은 사쿄노다이부 및 간레이다이로서 호소카와 다카쿠니와 함께 막부 정치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아시카가 요시즈미와 호소카와 스미모토가 교토 탈환을 시도하며 반격해왔다. 1510년 1월, 요시오키는 호소카와 다카쿠니와 함께 오미를 공격했지만, 오히려 패배하였다. 아시카가 요시즈미 측은 1511년 7월, 셋쓰를 공격해왔고, 오우치 요시오키는 호소카와 다카쿠니와 함께 출진했지만, 셋쓰와 이즈미에서 패배하여 단바로 후퇴하였다. 그러나 8월 14일, 아시카가 요시즈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롯카쿠 다카요리가 배신하는 등 상황이 유리하게 바뀌었다. 8월 23일, 후나오카야마 전투에서 호소카와 스미모토 군을 격파하고 교토를 탈환하는데, 이때 오우치 요시오키의 활약이 컸다고 한다. 1512년 3월, 요시오키는 이 공로로 종3위와 구교[38]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점차 쇼군 요시타네와 간레이 다카쿠니의 사이가 나빠졌고, 이즈모의 아마고 쓰네히사가 오우치 가문의 영지인 이와미와 아키를 침략하기 시작했다. 이에 1518년 8월 2일, 요시오키는 간레이다이 직을 사임하고 야마구치로 돌아갔다.

2. 4. 아마고 가문과의 싸움 (1518년 ~ 1528년)

1523년, 아마고 쓰네히사는 이와미를 공격했고, 아키에서는 오우치 가문에 종속되었던 모리 가문이 아마고 가문으로 돌아섰다. 아마고 쓰네히사는 모리 모토나리를 이용하여 오우치 가문의 아키 경영 거점이었던 가가미야마 산성을 공략하는 등 잠시나마 오우치 가문을 압도했다.[1]

1521년부터 오우치 요시오키는 아키, 이와미로 진격해 해마다 아마고 가문과 싸웠지만, 큰 전과는 없었다. 그러나 1524년 아키 이쓰쿠시마섬으로 진격해 사토카나 산성 공방전에서 아마고 군을 격파하였고, 1525년에는 모리 모토나리가 다시 오우치 가문으로 종속되었기 때문에 아키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또, 아마고 가문도 산인 방면에서 야마나 가문과 전투를 치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와미에서도 세력을 잃었다.[1]

1528년, 오우치 요시오키는 아키 가나야마 산성 공격 중 병으로 쓰러져 야마구치로 돌아온 직후 사망하였다. 향년 52세. 가독은 적자 오우치 요시타카가 계승하였다.[1]

3. 무역

조선명나라와의 무역은 오우치 요시오키에게 군사비를 조달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1506년 조선에서 중종반정이 일어나면서 대일 무역 정책이 변화했고, 1510년 삼포왜란까지 겹치면서 조선과의 무역은 어려워졌다.

1508년, 요시오키는 쇼군을 옹립하고 막정을 장악하면서 호소카와 가문이 가지고 있던 명나라와의 무역 독점권을 가져왔다. 1516년에는 쇼군과 부교 관리들이 오우치 가문에게 명나라와의 무역 독점권을 영구적으로 부여하는 선언을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1523년, 호소카와 가문이 이에 대항하여 명나라에서 오우치 가문과 대립하는 닝보의 난이 발생한다. 이 사건으로 오우치 가문의 사신이 죽고, 명나라 관료까지 죽게 되면서 오우치 가문과 명나라 사이의 무역은 잠정 중단되었다.

3. 1. 조선과의 관계

조선명나라와의 무역은 군사비를 조달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1506년 (연산군 12년) 조선에서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일본과의 무역은 배타적으로 변했다. 물품의 양과 가격을 통제하기 시작하면서 무역으로 인한 이익이 줄어들었다. 무역으로 실익이 별로 없자 요시오키는 선대에서 했던 것처럼 자신은 백제 왕의 후손이며 종례에 따라 특혜를 받고자 하였으나, 성과는 없었다. 더욱이 1510년 (중종 5년) 삼포왜란으로 조선과의 무역은 더욱 어려워졌고 실익도 없었다. 1508년 쇼군을 옹립하여 막정을 장악한 요시오키는 호소카와 가문이 해왔던 명과의 무역도 독점한다. 하지만 1523년 호소카와 가문이 이에 대항하여 명나라에서 오우치 가문과 대립 끝에 오우치 가문의 사신이 죽고 민가가 불탔으며, 이 일로 명나라 관료까지 죽게 된다. 이를 닝보의 난이라고 한다. 닝보의 난으로 오우치 가문과 명나라 사이의 무역은 잠정 중단되었다.

3. 2. 명과의 관계

조선명나라와의 무역은 군사비를 조달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1506년 (연산군 12년) 조선에서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일본과의 무역은 배타적으로 변했고, 물품의 양과 가격을 통제하기 시작하면서 무역으로 인한 이익이 줄어들었다. 무역으로 실익이 별로 없자 요시오키는 선대에서 해왔던 방법으로 자신은 백제왕의 후손이며 종례에 따라 특혜를 받고자 하였으나, 성과는 없었다.[1] 1510년 (중종 5년)에 일어난 삼포왜란으로 조선과의 무역은 더욱더 어려워졌고 실익도 없었다. 1508년 쇼군을 옹립하여 막정을 장악한 요시오키는 호소카와 가문이 해왔던 명과의 무역도 독점한다. 하지만, 1523년 호소카와 가문이 이에 대항하여 명나라에서 오우치 가문과 대립 끝에 오우치 가문의 사신이 죽고 민가가 불탔으며 게다가 이 일로 인해 명나라 관료까지 죽게 된다. 이를 닝보의 난(寧波의 亂)이라고 한다. 닝보의 난으로 오우치 가문과 명국 사이의 무역은 잠정 중단되게 되었다.[1]

1516년, 쇼군(将軍)과 부교(奉行)인 관리들은 오우치 씨(大内氏)에게 명나라(明)와의 무역 독점권을 영구적으로 부여하는 선언을 발표했다. 이 결정 이전에, 사카이의 호소카와 씨(細川氏)와 하카타의 오우치 씨는 독자적으로 명나라와 무역을 했으며, 바쿠후(幕府)로부터 명나라와의 무역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서로 경쟁했다. 호소카와 다카쿠니(細川高國)의 분노와 달리, 오우치 씨에게 독점권이 부여됨으로써 하카타가 명나라와의 무역 중심지가 되어, 호소카와 씨는 상당한 수입 감소를 겪게 되었다. 오우치 씨를 지지하는 군사력 때문에 다카쿠니는 이 선언을 뒤집을 수 없었다. 그러나 1519년 요시오키(義興)가 야마구치로 돌아온 후, 다카쿠니는 상황을 바꾸려는 계획을 세웠다. 1523년, 요시오키는 겐도 소세츠(剣豪宗雪)를 사절로 명나라에 파견했다. 한편, 다카쿠니는 란코 주이사(蘭渓瑞佐)를 수석 사절로, 송수칭(宋素卿)을 부사절로 파견했다. 그는 그들에게 홍지제(弘治帝)의 만료된 관인을 주고 남쪽 해상 루트를 이용하게 했다. 호소카와 씨에게 불리하게도, 오우치 씨의 배가 닝보(寧波) 항에 먼저 도착했지만, 소케이(宗慶)는 항구의 세관을 매수하여 자신의 배를 먼저 검사받았다. 닝보의 난(寧波事件)으로 알려진 이 사건에서, 오우치 씨는 호소카와 씨의 배를 공격하고 불태웠다. 또한 오우치 씨는 호소카와 씨를 편든 중국 당국에 대해서도 분노를 표했다. 이 갈등에서 겐도 소세츠는 란코 주이사를 죽였다. 송수칭과 중국 항구 관리들은 소흥(紹興)으로 도망쳤다.[2]

4. 문화

요시오키는 구게와 같은 인물로 전해지지만, 연약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생애 전반을 전장에서 보낸 무장이었다. 오히려 구게와 같은 일면이 있기 때문에 교토에서 도망쳐온 구게를 야마구치로 맞아들여 조정과의 연락체계를 구축했으며, 더욱이 교토 문화를 야마구치에 꽃피워 오우치 문화를 창출, 야마구치를 서쪽의 작은 교토라 불리게 하였다. 오우치 가문의 전성기를 구가한 인물이다.[1]

5. 계보

백제 성왕의 셋째 아들 임성태자가 오우치 가문의 시조라고 전해진다. 족보를 잃어버려 백제왕의 후손이 맞느냐는 의심을 받자 그는 조선 왕 정종에게 집안이 백제에서 건너온 것을 입증하는 자료를 부탁하는 사신을 보내기도 했다.[39]

나는 백제의 후손입니다. 일본 나라 사람들이 나의 세계(世系)와 나의 성씨(姓氏)를 알지 못하니, 갖추어 써서 주시기를 청합니다.|나는 백제의 후손입니다. 일본 나라 사람들이 나의 세계와 나의 성씨를 알지 못하니, 갖추어 써서 주시기를 청합니다.일본어

: — 정종실록 1년 7월 10일

일본에 정착한 임성태자의 후손이 스오국 다타라하마에 기착해 오우치무라에 살았기 때문에 성(姓)은 다타라(多多良), 씨(氏)는 오우치(大內)로 했다고 전해진다.

6. 인물 및 일화

요시오키는 구게와 같은 인물로 전해지지만, 연약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생애 전반을 전장에서 보낸 무장이었다. 오히려 구게와 같은 일면이 있기 때문에 교토에서 도망쳐온 구게를 야마구치로 맞아들여 조정과의 연락체계를 구축했으며, 더욱이 교토 문화를 야마구치에 꽃피워 오우치 문화를 창출해 야마구치를 서쪽의 작은 교토라고 불리었다. 오우치 가문의 전성기를 구가한 인물이다.

상락을 달성했지만, 막정에 오래 관여하지 못한 것은 자신의 영지가 너무 서쪽에 치우쳐 있고, 호족들의 연합맹주로서의 한계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요시오키가 천하 패자로 군림한 기간은 길지 않다.

영정 9년( 1512년) 사가노의 사이호지에서 "かくばかり 遠き吾妻の 不二がねを 今ぞみやこの 雪の曙"라고 읊은 기록이 있다.[24][25]

7. 요시오키의 이름을 받은 인물들

大内義興|오우치 요시오키일본어에게서 이름 첫 글자를 받은 대표적인 인물은 다음과 같다.


  • 깃카와 '''오키'''쓰네(吉川'''興'''経)
  • 고바야카와 '''오키'''카게(小早川'''興'''景)
  • 스에 '''오키'''후사(陶'''興'''房)
  • 나이토 '''오키'''모리(内藤'''興'''盛)
  • 모리 '''오키'''모토(毛利'''興'''元)


요시오키는 가신뿐만 아니라 주변 여러 제후에게도 자신의 이름 첫 글자인 "'''오키(興)'''" 자를 주었는데, 이를 통해 당시 그의 세력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행은 아들 요시타카 시대에도 이어졌다.

참조

[1] 웹사이트 Kotobank: 大内義興 ""
[2] 서적 大内系図
[3] 서적 氷上山上宮参詣目録
[4] 서적 蔭涼軒日録
[5] 서적 山口県史 山口県
[6] 서적 萩藩閥閲録
[7] 서적 山口県の歴史と文化 大学教育出版 2002
[8] 서적 晴富宿袮記
[9] 서적 中世武士選書‐大内義興 戎光祥出版 2014
[10] 서적 大内家譜
[11] 서적 内藤氏譜録
[12] 서적 山口県史 山口県
[13] 서적 大乗院寺社雑事記
[14] 서적 五社参詣次第
[15] 서적 肥陽軍記
[16] 서적 東寺過去帳
[17] 서적 白崎八幡宮楼門棟札
[18] 서적 六所神社棟札
[19] 서적 京都将軍家譜
[20] 서적 重編応仁記
[21] 서적 足利家官位記
[22] 웹사이트 王代一覧 ""
[23] 서적 公卿補任 経済雑誌社
[24] 서적 大内義隆記
[25] 서적 扶桑拾葉集
[26] 서적 南海通記 弘成舎
[27] 서적 香西記 香川県
[28] 서적 公卿補任 経済雑誌社
[29] 서적 山口県史 資料編 中世2
[30] 서적 高嶺太神宮御鎮座伝記
[31] 웹사이트 Kotobank: 大内義興 ""
[32] 서적 大内系図
[33] 서적 氷上山上宮参詣目録
[34] 문서 大内義興
[35]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www.nichiren.[...] 2010-12-08
[36] 서적 五社参詣次第
[37] 서적 肥陽軍記
[38] 문서 구게 중에서도 종3위 이상의 고관을 가리킨다.
[39]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www.nichiren.[...] 2010-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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